추모와 기도, 켄 리우 리뷰: 인공지능과 접합된 인간

추모와 기도. 중국 SF작가 켄 리우가 쓴 단편으로 SFnal 2021 Vol 1에 실린 번역본을 읽었다.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총기테러에 휘말려 차가운 시신이 되어버린 딸의 모습에 상심한 어머니 에비게일은 이와 같은 비극을 막자는 대의를 내건 총기규제 운동에 합류한다. AI기술을 동원한 감동적인 다큐멘터리가 그려낸, 찬란한 가능성을 품은 청춘이 총기테러로 한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은 큰 반향을 이끌어내 정치권까지 진동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이에 반발하는 인터넷 싸움꾼들이 등장한다.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딸의 영상을 오염시키기고, 음란물, 스너프 필름 등과 뒤섞어 딸과의 추억을 더럽히기 시작한다. 에비게일은 그들에게 맞서 딸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딸을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 것인가를 두고 주도권 싸움이 벌어진다.

이 이야기에서 다뤄지는 건 재현과 실제의 괴리다. 사람이건 사건이건 감정이건 무언가를 재현하려고 복제품을 만들고보면 실제와는 거리가 멀어보인다는 현상이다. 그 사실을 자각할 때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역으로 실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 더 낫게 재현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런 재현과 실제의 괴리에 담긴 의미를 작 중에선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다음부터는 스포일러가 들어있다.

어머니 에비게일은 사진신봉자다. 흔히 사진을 찍어 추억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각종 기술로 사진을 꾸며 더 기분좋은 추억을 남기려고 노력한다. 나중에 더 보기 좋도록.
그런 에비게일이기에 딸의 시신을 확인한 것으로 딸의 죽음을 끝내버릴 순 없었다. 작중 묘사에서 에비게일이 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은 총기규제의 대의보다는 딸의 인생을 어떻게 기억할지 결정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인터넷 싸움꾼들, 작중 용어로는 트롤러, 은 총기규제 선전으로 나오는 영상물을 고깝게 여겼다. 왜 그랬을까? 사실 후반에 트롤러의 입장문같은 것이 나오긴 하는데 거기서는 스스로 정치적 선전에 참가한 이상 남이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건 당연한 권리라는 식의 이야기만 나올 뿐이다. 하지만 할 수 있다고 해서 왜 하는지는 딱히 설명이 없었던 것 같다. 추측해보자면 별볼일없어보이는 사람이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는 이유만으로 고결한 순교자로 떠받들여지는 것,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고결한 대의에 참가하고 있다는 충족감을 느끼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트롤러들은 에비게일의 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잔혹개그영상, 음란영상 등으로 짜집기해 인터넷 상으로 퍼뜨린다. 영상이 부여한 딸의 죽음의 비극성을 제거해 웃음거리로 만들고, 딸에게 모인 사람들의 마음이 대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셀럽에 환호하는 얄팍한 것이라고 조롱한다.

에비게일은 딸의 조롱에 맞서 열심히 맞서 싸우나 그 많은 쪽수를 당해내는 건 불가능해서 결국 인공지능 필터를 이용해 트롤러들의 게시글을 의도적으로 보지 않도록 했다. 인공지능 필터의 원리는 게시글을 접했을 때 에비게일의 감정변화를 모니터링하는 것이다. 트롤러가 만든 영상 등이 에비게일에게 불쾌감을 주므로 필터는 에비게일의 반응을 토대로 어떤 영상을 차단하면 될지 알 수 있다.

그러자 트롤러들은 그 필터를 뚫기 위해 영상의 위장을 더하기 시작한다. 처음은 에비게일이 좋아하는 다큐멘터리스러운 딸의 영상으로 시작해서 갑자기 뒤바뀌는 식으로. 그런 해킹이 이루어지자 결국 에비게일의 감정은 딸 자체를 스트레스 요인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딸에 관한 영상만 보면 긴장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를 학습한 필터는 에비게일로부터 딸의 모습을 앗아가버렸다. 딸의 모습을 필터링한 것이다. 에비게일이 더 이상 딸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장면은 여운이 크게 남는다.

그런데 책을 다 덮고 생각을 해보면 이상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을 저렇게 사랑한 부모가, 남들의 왈가왈부 때문에 자식을 스트레스 요인으로 인지하는 게 말이 될까? 그냥 말만 듣고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전개다. 그런데 완전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유도한 극적 논리를 되짚어보면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맨 처음, 에비게일은 딸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그 다큐멘터리에 들어간 각종 인공지능 기술들은 스토리텔링의 최고봉에 오른 것이어서 총기테러의 희생자1인에 불과했던 딸을 부당하게 꺽여버린 찬란한 청춘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렇게 대중의 인식을 바꾸었다. 이미 이 시점에서, 스토리 상으로는, 누군가가 딸에 대해 갖는 인상은 조작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조작은, 딸의 삶이라는 실제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걸 풀어놓는 형식에 달린 것이 되었다. 딸을 어떤 형식, 장르에 맞춰 창작물을 만드느냐로 남들의 딸에 대한 인상을 결정해버리는 게임을 에비게일이 개최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에비게일 또한 같은 룰에 지배당하며 트롤러들의 공격에 취약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논리가 극중 논리가 아닌 정치적 층위에서도 비슷하게 되풀이되고 있다. 입장선언문에서 트롤러가 주장하길, 공공의 정치적 상징으로 딸을 내세운 이상 딸에 대해 에비게일이 스스로 대중에게 먹잇감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고 이를 감내해야한다고 말이다. 이건 내가 가진 인상을 남이 바꿀 수 있다, 가 아니라 그래도 된다, 라는 당위의 이야기라 좀 다르긴 하다. 사실 트롤러의 생각과 주장은 묘하게 얽히고 설켜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직 잘 이해를 못한 것 같다.

그리고, 또 에비게일을 외부의 공격에 취약하게 만든 요소가 인공지능 필터다. 아까도 설명했듯이 인공지능 필터는 에비게일의 감정에 연동해 학습한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다보면 에비게일의 감정과 인공지능 필터가 동일시하게 된다. 그리고 현대문명인이라면 인공지능의 학습방식과 그게 얼마나 쉽게 엇나갈 수 있는지는 당연한 사전지식이다. 그래서 인공지능 필터가 트롤러를 걸러내는 게 아니라, 딸을 걸러내버렸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고, 그 필터가 에비게일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니까 에비게일의 마음도 딸을 스트레스 요인으로 인지하게 변해버렸다, 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인공지능 필터를 장착하는 것으로 스토리 상, 에비게일은 인간이면서 인공지능적 정서를 가진 키메라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건 나 혼자의 감상이고 논리의 비약을 잘 감지하는 사람들은 속아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읽고 작가가 되게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이 동일시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도 있는 것 같다.

에비게일은 트롤러들에게 졌다. 자신이 바라던 딸의 이미지를 지켜내지 못했고 딸의 이미지는 오염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에비게일은 어떻게 해야했던 걸까? 뭘 잘못했던 걸까? 트롤러가 비난하는 것처럼 에비게일이 딸을 고귀한 순교자처럼 미화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에비게일의 남편, 필름사진을 비롯한 그 어떤 재현에도 반대하는 사람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 그 또한 답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정답은 밀어붙이는 쪽이 아닐까. 마치 경전을 읽듯 에비게일이 자신이 그리는 딸의 모습을 철저하게 추구했다면 어땠을까. 자기자신 또한 모순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딸이 어떤 존재인지 확고한 상을 만드는 것이다.

독서라는 것도 그렇다. 요즘엔 책에 대한 해석은 무궁무진하고 작가가 정해놓은 정답이란 건 없다는 식의 말이 횡행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답은 있다. 책을 관통하는 원리원칙을 찾아서 스스로 모순점을 찾을 수 없을 때까지 해석을 정립하는 게 이상적인 독서일 것이다. 그 쯤되면 남의 해석에 영향을 받는 건 오히려 기쁨이 된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것이니까. 그리고 얼토당토않은 해석은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된다. 읽었으면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원리원칙을 토대로 배우지 않는다.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사실일 확률이 높은, 그럴듯해보이는 것을 배운다. 의미가 분류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쌓이고, 오염된다. 유투브에서 안 보던 영상 하나만 클릭해도 추천영상이 전부 그런 류로 도배되는 것처럼. 그런 정신으로는 트롤러들이 주입하는 의미도 거부하지 못하고 전부 학습해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에비게일은 딸을 잃고 말았다.

이쯤되면 이야기의 주인공 에비게일의 초상이 꽤나 익숙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인터넷 등지에서 음모론 썰을 주워먹으며 자기들끼리 화력발전을 돌리는 인간들이다. 절로 감탄이 나왔다. 와, 이런 인물로 이렇게 감동적이고 훌륭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다니. 내가 최근에 본 소설들에선 트롤러들이 쓴 건지 무슨 준비운동하는 것마냥 새로울 것도 없는 뻔한 레퍼토리로 조롱하는 이야기 밖에 없었는데. 참 탁월한 작가인 것 같다.

아, 재현을 어떻게 해야하느냐, 라는 주제 말고도 흥미로운 부분이 남아있다. 바로 재현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이 부분은 예전에 썼던 햄릿이야기의 해석에 관한 책의 이야기와 겹친다. 해석은 결국 실제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해석하는 사람에 대한 것까지 들어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에 대한 해석은 자기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자신의 연장선이 되어버린다.

후반에 죽은 딸의 동생의 이야기가 나온다. 동생은 에비게일이 만든 영상의 언니가 자신이 아는 언니같지 않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런 말을 집안에서 할 수가 없다. 죽은 언니가 최고중대사가 되어버린 집안에서 동생은 숨막혀한다. 언니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부정당하는 것은 자신을 부정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트롤러들이 있다. 트롤러는 에비게일을 비난하며, ‘겁쟁이가 망상증 영웅으로’ 자신을 착각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사실 트롤러의 입장문에는 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그저 에비게일 및 대중들이 딸의 죽음에 슬퍼하고 대의를 표방하는 것을 도덕심 과시이자 위선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뿐이다. 총기테러따위는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고 딱히 슬프지도 않으면서 자기자신을 중요하고 도덕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싶어서 가식을 떤다고 말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트롤러의 총기테러에 대한 해석이 트롤러 자신이 어떤 입장을 가진 인간인지 말해준다. 그리고 그 해석을 지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딸의 죽음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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